풍수이론

양기풍수(陽基風水)

최고관리자 0 3,540 2016.11.28 15:35

 

風水思想이 不動産價에 미치는 영향    

 
 第1節 양기풍수(陽基風水)
 Ⅰ. 陽基의 槪要
      풍수를 二大分하여 생자(生子)의 거소(居所)를 양기(陽基)라고 하고 사자(死者)의 居所를 음택(陰宅)이라 하며, 陽基는 陽宅을 合한 개념이며 垈地를 말한다. 陽宅은 인간이 起居하는 건물을 말한다.
    양택의 宅과 양기의 基, 똑같은 주거에 사용되는 문자이지만, 그 용어의 관습상 宅은 사람이 들어가 사는 것, 基는 이 宅을 둘 수 있는 토지를 의味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대지가 중요한 것이지 그 위에 조성된 건축물의 大小壯陋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는 일본인 村山智順의 주장이 있듯이 일본은 양기를 중요시하고 있다. 그러나 건물 조영 양식이 중요치 않다고 하였으나 양택 풍수에 있어서는 기지선정 못지  않게 건물의 방위와 배치가 지대한 영향을 거주 인에 미친다는 일반적인 풍수논리가 인정되는 만큼, 이 점도 논리구성에 있어서 잘못된 인식 출발이라 할 수 밖에 없겠으나, 양택풍수는 주거 건조물, 양기는 취락(聚落)입지(立地)를 지칭하는 용어라 할 수 있다.
 
Ⅱ. 양기(陽 基)
 1. 都邑의 風水的 考察
     옛날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聚落中에서 그 立地가 풍수적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고을은 없는 듯 하다. 聚落立地가 풍수와 깊은 관련성을 맺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보는 입장에 따라서 상당히 차이가 나는 평가가 나올 수 있지만, 風水가 聚落立地에 깊은 영향을 미친 것이 분명한 이상, 지역성을 밝히고저하는 지리학에서 이에 대한 연구가 더 있어야 하겠다.
     인간문화생활에서 거주문화로서 풍수사상이 정착된 것은 상고시대라 할 수 있다. 즉, 가장 이상적이라고 하는  장소 중 자연적 조건만을 간추리면 <山林地에서 全方向 배수가 가능하고, 表土는 흙이고 그 아래는 모래이며 잔디가 깔린 원시림으로 땔감이 많이 있거나 수지(樹枝)가 많고 절목(絶木)이 있는 곳, 완경사로 청결하고 맑은 물이 근거리에 있는 장소가 된다.
     원시취락의 경우는 여기에 식료문제가 결부되어야 하는 만큼 보다 복잡한 입지 상태를 보일 것이지만 사이트로서의 조건은 위 기술내용에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본다. 다만 原始聚落의 경우는 음료와 식료재취의 편이이기 때문에 해안이나 河岸에 立地하였다는 증거가 있는 만큼, 우선 물과 立地와의 관계는 定立된 셈이다. 그 후 점차 내륙 쪽으로 옮겨가 山이 이입되었고 결국 山水相補라는 기본적인 풍수관념이 마련되었으리라 본다. 풍수적 사고개념은 먼저 물과 결부되고 그 후에 山이 이입되는 과정이며, 이것이 후에 풍수설로 정착됨에 있어서도 역시 山水中 水를 더 중요시 하는 경향으로 발전되었다.
     朝鮮朝의 邑聚落의 槪念을 약술하면 朝鮮朝行政制度는 서기 1413년(太宗 13년)頃 개혁이 있은 뒤에 全國을 八進으로 나누고 그 밑에 4府 4大都護府, 20牧, 43都護  府, 82郡, 175縣을 둔 형태였다. 이 中에서 4가지 조건을 기준으로 3개의 邑聚落을 선정하게 되며 分折하고저 하였다.
     첫째 : 邑聚落의 地理的 代表性
     둘째 : 實地勢의 現地調査가 용이한 곳.
     셋째 : 관찰사의 임지였던 곳.
     넷째 : 수도 이외 지역이고 잘 알려진 곳.
     이러한 곳을 선정하면 公州, 全州, 尙州를 선정하게 된다. 세 곳은 모두 고을 州字를 가진 곳이고, 종二품인 府尹의 임지인 조선왕조의 대표적 邑聚落이라 할 수 있다.


 2. 邑聚落의 立地 構造 
   1) 自然條件
        입구분포의 양상이 지표상 자연환경의 유형과 깊은 연관성을 띠고 있는 현상은 지리학에서 주지의 사실이다. 취락의 자연적 입지조건으로는, 地形, 地勢, 氣候, 土壤 等이 중요하다. 「公州」는 충남의 중앙 남서부에 위치하여 尙州와는 거의 同緯度이다. 충남은 北東에서 南西로 달리고 있는 차영산맥에 의하여 두 개의 지형으로 나누어진다. 北南 地形區에는 삽교천, 曲橋川유역의 禮唐平野와 그 주변의 伽倻山脈, 泰安半島, 牙山丘陵지대 等이 전개되며 南東地形道에는 주로 금강유역인 內浦平野와 錦山 盆地등이 펼쳐저 있다. 公州는 후자에 속한다.
       「公州」북쪽 山陵線의 발달방향은 거의 남북에서 동 또는 서방향으로 약간씩의 변동을 보이며 발달하고 있다. 이는 마치 <s>字를 南北으로 길게 늘어 놓은 것과 같은 유형이다. 하천은 弓形으로 西流하는 금강과 이에 합류되는 대소 지류 군이 주이며, 이밖에 남부에서 南西流하여 魯城川을 거쳐 江景 부근에서 錦江下流로 합유되는 支流와 南東部에서 北東流하여 錦江上流로 流入되는 것을 들 수 있다.
        邑을 중심으로한 대체적 지세는 북쪽에 금강 弓形 혹은 <八>字 형태로 지나고 그 한 지류가 邑을 관통하여 北流하면서 北쪽을 제외한 나머지 방향은 山에 둘러싸여 盆地狀을 나타나고 있다.
       「全州」동쪽의 가장 높은 곳은 소백산맥을 이루는 大起狀 山地이고 2˜3段은  蘆嶺山脈이 통과하는 中起伏山脈이며, 西쪽은 넓은 호남평야가 펼쳐진다. 따라서 東半部는 평야지대로 양分한다. 주변 산지는 대부분 低山性인 노령산맥의 지맥이나 지괴산지들이 평야부와의 경계를 이루는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岩質에 따라서 특유의 산형을 이루기도 한다. 서쪽을 제외하면 역시 산에 둘러싸인 형태이기 때문의 지형학성의 盆地는 아니지만 盆地狀 지세라 볼 수 있다. 南쪽의 南固山, 完山七峯, 北西쪽의 多佳山, 油然臺, 北쪽의 僧岩山, 麒麟峯, 乾止山, 可蓮山等이 邑을 바로 외곽에서 둘러싸고 있는 山勢이고, 全州川, 高山川, 所陽川 등이 邑 혹은 邑 주위를 감싸며 合流하여 萬頃江에 合流하는 水勢를 보인다. 全州川과 三川川은 邑의 北西쪽에서 합류 하며 그 후에는 秋川이라 불리 운다.
       「尙州」는 支流인 南川과 北川 사이에 위치한다. 洛東江유역은 흔히 洛東盆地로 알려진 곳으로 地體구조의 영향을 받아 南北走向으로 알려져 있다. 高度點平面 (七峯面)에 의한 地形區는 北部盆地, 南部盆地, 中間盆地로 三大分되며 특히 尙州가 포함된 北部盆地는 北部大盆地와 北部小盆地로 세분된다. 北部大盆地는 安東 義城이 그 中心이며 英陽, 靑松, 軍威, 尙州 일대를 포함하는 전형적이고 제일 큰 분지이다. 邑 주위 지세로 盆地內에 비교적 넓은 平野部를 分流하는 동쪽 일부를 제외하면 전형적인 분지상지형을 나타내고 있다.
   2) 人文․社會的 條件
        聚落立地論에서 入文․社會的 條件은 매우 광범위 하여 제한을 가하지 않으면 혼란의 우려가 있다. 歷史, 文化, 政治, 經濟, 社會, 風俗等 자연환경 이외에 인간이 이룩한 모든 조건을 여기서 언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그와 같은 넓은 범위에서 立地구조를 언급한다는 것은 不可能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세, 지역의 연혁, 읍구조, 주변지역의 교통관계를 살펴보고저 한다.
        人間의 생활이 자연에서 이루어지는 만큼 인문사회조건이라 하더라도 독립되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택리지 복거 총논에서 사람이 살만한 네가지 조건 즉 地理爲上, 生利次之. 次則人心, 次則山水는 시사한 바 크다.
        *「公州」는 本來 백제의 웅천으로 文周王때 북한산성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기었다. 고려 태조 23년(940년) 公州로 개칭하여 牧으로 내려오나 경우에 따라 감격되는 경우도 있다.
        *「全州」는 本來 百濟의 完山이며 比欺伐, 比自火라고도 한다. 神文王때 完山州를 두었다가 景德王 때에 全州라 하였으나, 孝恭王때 견훤이 여기에 建都하고 後百濟라 하였다. 高麗 太祖 14년, 후백제의 神文王때 完山州를 討平하여 安南都護府라 하였다가 23년 다시 全州라 하였다. 全州府域은 없어졌으나 현재의 中央洞 우체국을 中心으로 반경약 500미터의 원형의 근사한 것으로 조사 되었다. 全州는 명실 공히 湖南의 首府로서 주변지역과의 관계 역시 원활하다. 南面으로 平野全部를 관장하고 東으로 山間地方을 통활하여 南北으로는 中央과 南海岸을 잇는 驛路 요충의 立地로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곳이다.
        *「尙州」는 本來 沙伐國인테 新羅初에 귀속되어 法興王때 尙州로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尙州 역시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交通이 불편한 곳일 수 있지만 도보 위주의 조선조 시대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 洛東江 연안으로 강유역 일대를 지배하고 물산을 수집할 수 있는 매우 유리한 위치였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Ⅲ. 邑聚落의 立地와 風水的 考察
   ꡐ公州, 尙州가 立地類型中, 內陸盆地狀, 地勢의 취락에 속하는 것임을 勿論이며, 前述한 바와같이 조선조 취락은 전근대적 산업방식이 위주였던 만큼 입지기반의 기초는 자연적 조건에서 찾지 않을 수 없다.
     그 中에서 기후조건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는 없으나 해당지역의 小氣候學的인 관측이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이를 제외하면 지세조건이 가장 큰 因子일 수 밖에 없다. 自然조건이 立地에 큰 영향을 미쳤음은 분명하지만 보다 더 중요하고도 결정적 영향을 미쳤던 것은 당시 지리적 가치관이었던 듯하다고 본다. 內陸盆地狀 취락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외의 취락의 경우도 立地的인 무리를 해가면서 까지 지리적 가치관에 부합토록 애를 쓴 흔적이 역력하다. 특히 風水思想이 절대적이었다.
     첫째, 조선조의 대표적 官擇地理誌및 新增東國誌인 新增東國與地勝覽에서는 모든 邑聚落 山川條에서 반드시 鎭山을 배후하고 있다는 점이다. 鎭山은 聚落의 후면에 위치하여 그 취락을 鎭護, 表象하는 상징성을 내포하는 것으로, 멀리서도 취락을 대표할 수 있는 수려 장엄한 산세의 산으로 이루어 진다. 鎭山의 의미성은 그것이 방어나 계절풍과의 관계에 의한 合理的 이유 이외에도 상징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취락입지에 대한 특이한 風水思考의 表出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鎭山의 해석이 어떻든 그것이 관선지리서에서 중시되었다는 것은 결국 都邑立地가 일차적으로 風水說에 입각했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여 주는 것이다. 鎭山 뿐만 아니라 都邑의 내부구조도 풍수사고의 영향에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風水說이 都邑의 내부구조에 미친 영향은 매우 다양한 편인데 우선 국면이란 측면에서 다음과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
     風水의 기본구성요소인 山과 水는 그 자체로서의 生成을 이루지 못하며, 마치 天과 地가 合하여 人을 생성하듯이 山과 水가 合하여야 氣가 成立하며 局面이 생성되는 것이라 본다. 原始的 天地人의 象이 山水氣의 象으로 변환을 이루고 이 山水氣가 山, 水, 局面이라는 形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相反된 양극의 결합 즉 양극을 제3의 조건으로 변형시키는 차원 높은 合成에 대한 原型的 心象을 統合 象徵이라 한다. 山과 水의 변증법적 변환 또는 통합상징에 의한 局面의 형성은, 고대 동양에서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古代 이집트에서는 이 변증법적인 局面形成을 위해 나일강변에 피라미드를 건설했는데, 피라미드는 山이 많은 나일강 상류에는 없고 山이 없는 나일강 하류에만 있는 바, 이것은 피라미드가 山이라는 건축적 상상력을 갖게 하기 위함이었다. 또 中美의 古代都市. Teotihuacan에서의 피라미드 운하, 멕시코 마야 文明의 Chichenliza에서 피라미드와 그에 대칭되는 깊은 못에 의한 山을 형성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都邑風水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山, 水, 局面을 형성하면서 四神砂에 의한 限界을 이루어 地理的 全體性을 이루어 주며, 이것은 무질서한 혼돈 가운데에서의 질서 있는 체제를 잡아주는 구실을 한다. 이때 이 局面에 담겨지는 제기능도 나름대로의 위계를 가짐으로써 더욱 확고한 질서를 공간에 부여케 된다. 그런데 각 지역의 사회적 위계는 지혈의 위계와 합치되는 것을 바람직하다고 한다. 風水局面에서 가장 높은 곳과 中心이 되는 곳이 穴이다. 이곳은 局面의 中心이며 가장 內側에 위치하고 주위가 이 中心을 위해 존재한다.
     國都의 경우 穴을 비롯한 風水槪念과 官 및 寺刹, 書院, 住宅의 대응관계는 다음 表 에서 설명하겠다.
 
 Ⅳ. 首都 서울(漢陽)의 도읍풍수
1. 수도 서울(漢陽)
    이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도읍지 개성을 지기가 다하여 새로운 왕조에게 불리하다고 하여 한양 천도 설을 주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표면적으로 내세운 이유였고 실제로는 옛 왕조 고려 충신들이 뿌리를 내리고 살아 온 도읍지, 개성인지라,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는데 탐탁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왕조에 대한 민심이반에 대하여서도 우려를 했기 때문이다. 한양이라는 도읍지로 결정이 될 때까지 수많은 답사와 주장, 반론이 오고 갔는데 그 후보지들로는 현재의 육, 해, 공군 본부가 자리하고 있는 계룡산의 신도안과 신촌의 연세대학교 부근인 모악의 남쪽 및 불일사, 선재 등의 곳이 떠올랐다. 이어 태조는 손수 후보지들을 답사하는 가운데, 나라에 발생하는 자연적인 이변을 관측하고 지리적인 대사 결정에 참여해 온 기존의 서운관(書雲觀)외에 음양산정도감(陰陽刪定都監)을 임시기구로 설치하여 신도읍지 물색에 박차를 가하였다.
    서운관의 지관(地官)이었던 윤신달, 이양달 등과 권중화, 정도전, 남은, 하륜 등의 조정대신 및 무학대사 박자초가 태조의 특명하에 왕사(王師) 자격으로 태조의 정도(定都) 작업에 관여를 하게 된다.
    그 중에서 조정대신 권중화(權仲和)가 먼저 회룡고조혈(回龍顧祖穴)의 명당이라며 계룡산의 신도안을 후보지로 추천한다.
    태조는 신하들을 거느리고 계룡산 주변을 확인해 보았는데 산수가 서로 유정하게 감싸 안고 있는 형국으로서 명당이자 천하의 길지라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이에 따라 신도안에 궁궐을 짓기 시작했지만, 공사를 시작한지 1년여만에 중단되었다. 이유는 경기도의 관찰사였던 조정대신 하륜(河崙)이 중국의 풍수법인 수호신에 의해 산세를 측정한 결과, 산은 풍수지리상의 방위에 의해 건방(乾方)에서 오는데 물길은 손방(巽方)으로 나가므로, 산수의 음양배합이 상호 반대로 되어 좋지 않다고 태조에게 상소하여 공사중지를 주청하였기 때문이다.
    태조는 하륜의 주청을 받고, 다른 대신들의 조언인 도읍지가 남쪽으로 치우쳐 균형적인 국가 통치를 어렵게 한다는 두가지 큰 이유로 결국 신도안의 정도는 포기하게 되었다.
    하륜은 이에 모악의 남쪽인 현재의 신촌, 연세대학교 부근을 지명하여 이곳이 수법(水法)에도 합당하고 명당 형세도 갖춘 길지라고 아뢰었다.
    태조가 하륜의 상소를 받고 중신들과 모악에 당도하여 살펴보니, 과연 명당 형세이긴 했지만 터가 협소하여 한 나라의 도읍지로는 부적합하였다. 이에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고 궁궐을 동향으로 짓는다면 남산으로 연결되는 우백호(右白虎)와 북악산과 낙산으로 연결되는 좌청룡(左靑龍)이라는 명당 조건이 갖춰지게 되므로 태평천하를 얻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조선조 개국공신이며 실세가였던 조정대신 정도전은 거의 비슷한 지점을 천거하기는 했으나 북악산을 주산(主山)으로하여 경복궁 터를 진혈(眞穴), 즉 명당으로 삼고 남향으로 궁궐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과는 실세가였던 정도전의 지론대로 되었으나 인왕산을 주산으로하여 궁궐을 동쪽으로 향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 무학대사는 정도전의 의견대로 건축될 경우, 장자(長子) 왕위 계승이 어렵고 120년이 지나기 전에 변란이 발생하며 그 후로도 재난이 속발할 것이라면서 반론을 제기했다.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 등의 유학파 대신들의 주청에 동조하여 경복궁을 세우니 그곳은 북한산(일명 삼각산)을 태조산(太祖山)으로 하며 북악산을 주산(主山)으로, 앞쪽의 남산과 관악산을 각각 안산(案山)과 조산(朝山)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외청룡은 동대문의 이화여대 부속병원, 내청룡은 정독독서실 자리, 외백호는 신촌 뒤쪽의 모악(母岳), 내백호는 인왕산으로 삼았고(도면「서울 명산도」참조) 청계천을 명당수로 삼았다. 궁궐의 방향을 앉히는데 갑론 을박했던 당시 정도 작업 참여대신, 서운관의 지관들이었지만 현재 우리의 수도 서울인 한양이 도읍지로서 명당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손색이 없어, 태조는 마침내 고려의 도읍지 개성을 뒤로 하고 한양으로 천도하기에 이른다.
    지난 1994년 10월 28일이 한양도읍지 천도 6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러나 무학대사가 태조에 "중앙의 터가 넓고 평탄하며 주위 사방의 산세도 빼어나므로 명당 도읍지가 될만하다"고 했던 답산 소감은 술수적인 차원으로 떨어뜨려진 풍수학의 현재 위상과 무계획적으로 무식하게 개발되어진 서울의 산과 물에 대해 새삼 새로운 인식을 촉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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