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4)]인천국제공항 입지
여의도·김포 거쳐 영종도로… 대한민국 백년 관문공항 역사 소박한 촌부들의 섬에서 꽃피워
김민재 기자.
발행일 2020-03-05 제12면
인천이 아닌 곳에 공항이 들어선다는 게 상상이 안 될 정도다.
김포공항을 대체할 수도권 신공항의 영종도 유치는 한반도의 배꼽 자리에 위치해 수도권 관문도시 기능을 타고났던 인천의 숙명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항은 영종도와 마찬가지로 섬에 지어졌다. 일제는 1916년 서울 여의도를 군용지로 매수해 비행장을 건설했다.
당시 여의도는 모래가 쌓여 만들어진 한강의 사구(沙丘)로 도심과 단절돼 소나 키우던 작은 섬이었다. 용산과 노량진 등 당시 경인철도가 설치된 서울의 요충지와 인접해 있으면서 인적이 드문 여의도는 공항 입지로 제격이었다.
1916년 6월 13일자 매일신보에는 "용산철교의 하류 한강중의 대사주(大砂洲) 여의도는 71만평의 대사원(大沙原)인데 사구상(沙丘上) 100여호의 농촌은 6월 말로 전부 퇴거케 하야 목하 과반수는 철퇴하얏는데 다수는 영등포 부근의 시흥군 관내에 이주하는 중이며 차지(此地)는 군용지로 심히 고가로 매수한 것이라더라"는 기사가 실렸다.
이후 일본에서 항공 관련 법령이 제정됐고, 1929년 노량진~여의도 사이 도로 개설 사업이 완료되면서 격납고와 대합실 등 제법 공항의 모습을 갖췄다. 1㎞ 길이의 노량진~여의도 간 도로는 지금으로 치면 영종대교와 인천대교처럼 도심과 공항을 연결해주는 기능을 했다.
여의도공항은 좋게 말하면 동북아 '허브공항' 역할을 했지만, 이는 일제의 침략 거점을 의미하기도 했다. 중국 대륙을 침략하기 위한 중간 기항지 역할을 했던 거였다.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 18일 이런 굴곡진 역사를 가진 여의도공항에 장준하 등 임시정부 선발대가 C-47 미군 수송기를 타고 해방 조국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어 그해 11월 23일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 선생도 C-47로 여의도 땅을 밟았다. 지금의 여의도공원 자리다.
여의도를 시작으로 평양과 대구, 신의주, 함흥, 청진, 울산 등 6개 지역에 간이 비행장이 설치됐고, 1939년 3개의 활주로를 갖춘 김포공항이 역시 군용으로 만들어졌다.
김포공항은 당시 행정구역상 경기도 김포군 양서면 방화리였는데 지금은 서울에 편입됐다. 1963년 영등포구에 편입돼 공항동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1977년 신설된 강서구로 재배치됐다.
김포공항 자리는 너른 평야였다. 도심과는 다소 떨어져 있었지만, 올림픽대로, 강변북로 등을 통해 서울 접근성이 획기적으로 개선됐다. 김포공항은 1958년 국제공항으로 지정돼 여의도공항의 기능을 흡수했고, 이때부터 인천국제공항이 개항한 2001년까지 대한민국 하늘길의 관문 역할을 해왔다.
김포공항을 대체할 수도권 신공항 건설 필요성은 1960년대 후반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김포공항은 해방 후 미군에 의해 확장됐고,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됐다가 1951년 유엔군에 의해 길이 2천468m, 폭 45m의 활주로로 다시 태어났다. 1958년 국제공항으로 지정된 이후부터 우리나라 항공수요를 전담하다시피 한 김포공항은 1960년 후반부터 수요가 급증하고, 대형기가 취항함에 따라 수도권 신공항 건설이 정부 과제로 떠올랐다.
조사 결과에서는 평택, 이천 지역이 우수하다고 나왔으나 정치권 입김이 작용해 서울과 124㎞나 떨어진 청주 군 공항이 선정됐다. 국토 균형개발과 수도권 인구 분산 논리였다. 청주공항은 대통령에까지 보고돼 추진됐으나 결국에는 김포공항을 대체할 수도권 신공항이 아닌 중부권 공항으로서 역할이 축소됐다.
1988년 초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면서 수도권 신공항 문제가 다시 불을 지폈다. 김포공항 주변 소음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추가 확장은 미봉책에 불과했다. 정부는 소음피해가 없고, 24시간 운영이 가능한 해안 또는 해상에 수도권 신공항을 짓기로 하고 후보지를 물색했다. 이때 처음 인천의 외딴 섬 영종도의 이름이 등장했다.
두 지역은 해안을 끼고 있는 갯벌이라는 점에서 유사했고, 여러 조건이 비슷했으나 결국 영종도가 최종 낙점됐다.
영종도는 시화지구에 비해 소음 피해가 적었고, 수심이 2m 더 낮아 공사비가 적게 들었다. 특히, 공역 부문에서 시화는 수원·오산 군 공항의 영향을 받았다.
서울 기준 접근성도 영종도는 50㎞, 시화는 70㎞ 거리였고, 영종도는 미개발지인 서울 북부와 김포를 관통하는 전용도로 개설이 쉬웠으나 시화는 영등포와 안산 신도시 등 기존 도심을 가르는 도로를 건설해야 했다. 영종도는 기존 김포공항과의 연계도 용이했고, 시화는 주변에 농공단지가 개발될 계획이라서 공장 매연이 안개처럼 시정을 악화할 우려가 있었다.정부는 1990년 6월 14일 신공항건설 추진위원회 3차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영종도를 후보지로 결정했다.
반대 목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환경단체와 입지 탈락지를 중심으로 반대 여론이 있었고, 대책위까지 구성돼 여론전을 펼쳤다. 이들은 "김포공항과 중복되고, 공항 규모가 지나치게 크며 매립공사와 연약지반 보강 등 건설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점에서 입지로서 최악이라고 평가했다.
철새 도래지와 갯벌 훼손 등 환경파괴 논란이 일었고, 경인 축 교통난을 이유로 '서울에서 영종도까지 3시간 이상 걸릴 것'이라는 부정적 전망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우려는 인천공항 개항 이후 눈 녹듯 사라졌다.
허희영 한국항공대 경영학과 교수는 "인천공항 입지 선정 당시만 해도 여러 우려가 제기됐지만, 20년째 들어선 지금에 와서는 모두 불식이 됐다"며 "영종도는 섬과 섬을 매립해 만든 넓은 땅을 활용한 활주로 확장 가능성이 풍부하고, 도심과 떨어져 24시간 운영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또 "영종도는 '에어포트'뿐 아니라 레저, 쇼핑, 관광까지 가능한 '에어시티' 개념으로 성장했다"며 "만일 시화지구로 선정이 됐다면 공단 때문에 여러 제약이 있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영종도는 역사적으로도 한반도의 대외 요충지였다. 조선의 인문지리학자 이중환(1690~1756)이 쓴 '택리지' 경기도 강화부 편에는 "우리 왕조에 들어서는 삼남의 조세를 실은 배들이 모두 손돌목을 지나서 서울로 올라오므로, 바닷길의 요충이라며 유수관을 두어 지키게 했다. 또 (강화도) 동남쪽 건너편에 있는 영종도에 방어영(防禦營)을 설치하고 첨사를 두어 지키게 했다"고 나와 있다.
지종학 대한풍수지리학회 이사장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 입장에서 보면 남북통일을 가정했을 때 서해안 섬(영종도)이야말로 글로벌 전초기지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이라며 "지금은 접경지역이라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강화도 한강하구(조강)를 다니지 못하지만, 통일이 되면 반드시 서해안 시대가 도래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글/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